이황의 도산십이곡 분석 Up VH
- unprod642
- 2020년 10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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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의 도산십이곡 분석 Up
이황의 도산십이곡 분석
이황의 생애와 업적, 도산십이곡의 의의와 교육적 내용에 대해서 조사하였습니다. 이황레포트수정
1. 이황(李滉)의 생애와 업적, 사상.
2. 서론
3. 본론
4. 「陶山十二曲」이 끼친 영향
5. 「陶山十二曲」의 교육적(敎育的) 의의(意義)
6. 「陶山十二曲」의 교육적 내용
7. 「陶山十二曲」이 현대교육에서 적용
1. 이황(李滉)의 생애와 업적, 사상.
1) 이황(李滉) 생애와 업적
이황(李滉) : 1501(연산군7)~1570(선조3) , 경북 안동.
퇴계의 성은 李, 이름은 滉,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 도옹(陶翁), 퇴도(退陶), 청량산인(淸凉山人)등이며, 관향은 진보(眞寶)이다. 그는 연산군 7년(1501) 음력 11월 25일에 경상도 예안현(지금의 안동군 도산면 온혜동)에서 진사 이치의 8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부친이 진사였던 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양반이 지배하던 당시 사회에서 그도 신분상으로는 자신의 능력에 따라 장래가 보장되는 양반가문 출신이었다. 그렇다고 퇴계의 가정 환경이 유복하여던 것은 아니다. 그는 태어난지 불과 7개월 되던 때에 당시 40세의 장년이던 부친을 여의었다. 그로 말미암아 부친의 훈도를 받지 못하고 또 빈곤한 생활 곳에서 자라게 되었다. 부친을 여의던 당시 맏형 한 분만 결혼하였을 뿐, 다른 형제는 모두 어려서 가족의 생계를 어머니가 홀로 농사와 누에치기로 이어 가야 할 형편이었다. 퇴계 스스로 모친을 묘사하여 “뒤로 두 아들이 대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르게 되었어도 부인께서는 그영진(榮進)을 기뻐하지 않고, 항상 세상의 시끄러움을 걱정하였으며 비록 문자는 익히지 않았어도 그 의리(義理)를 가르쳐 주고 사정을 밝히는 식견과 사려는 사군자(四君子)와 같았다.”고 한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퇴계의 학문과 인격 형성에 모친의 영향이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퇴계는 34세에 대과에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로 벼슬을 시작하여 43세 때까지 대체로 순탄한 관료 생활을 보낸다. 종3품인 성균과 대사성에 이른 43세의 퇴계는 이 때부터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갈 뜻을 품는다. 퇴계는 50세 이후에는 고향의 한적한 시냇가에 한서암과 계상서당 및 도산서당을 세우고, 연구와 저술에 몰두하였다. 물러난 후에도 조정에서는 성균관 대사성, 홍문관과 예문관 대제학, 공조판서, 예조판서, 의정부 우찬성, 판중추부사 등 계속하여 제수하였으나, 받지 않았으며 마지못해 잠시 나갔다가도 곧 사퇴하여 귀향하기를 반복하였다. 이렇듯 관직에서 끊임없이 은퇴하려는 도의 뜻과 어디까지나 그를 놓아주지 않으려는 임금의 뜻이 항상 교차하여 한낯 ‘문서상의 임명과 사임’만이 계속된 것이 그의 노년기이다.
[문서정보]
문서분량 : 23 Page
파일종류 : HWP 파일
자료제목 : 이황의 도산십이곡 분석
파일이름 : 이황의 도산십이곡 분석.hwp
키워드 : 이황의,도산십이곡,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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